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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악연구회 설립배경 - 조동준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2-01-26 조회수|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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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악연구회 설립 배경

 

1) 판소리보존회의 창시 거론 자는 순천 벽소 이영민 (碧笑. 李榮珉)선생이고,

    

    자금 후원자는 순천 우석 김종익 (友石 . 金鍾翊) 선생임.

 

2) 구입일시: 1935년

 

3) 명칭 : 조선성악연구회

 

4) 소재지: 서울 익선동 157번지

 

5) 구입동기: 1935년 순천 벽소 이영민 선생은 항일 독립 운동가였다.

                   

                    일제의 조선문화말살정책으로 국악인들이

 

                    조직체 없이 방황하므로 순천에서 국악관극시사작업 중

 

                    친일지주 우석 김종익의 자금을 이용하여 국악을 활성화 시켜

 

                    독립운동에 활용코자하였다.

                   

                    그 계획이 적중 되어 우석에게 조선성악연구회 건립자금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우석 또한 고향에서 지주인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농민운동가 벽소 이영민을 달래고, 항일독립자금 막후지원도 되고

                   

                    박녹주를 지원할 수 있게 되는 세마리 토끼를 잡은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6) 정광수 선생 녹취록 보관:   2003년 7월 15일.

 

7) 현장탐방: 2006년 한갑주선생 안내로 익선동 2회 현장탐방 하였음.

 

 

*조선성악연구회와 우석 김종익 관련 내용*

 

1) 1935년 서울 익선동 157번지에 대지 500평 건물 200평의

     

    조선성악연구회 설립기증자 순천 부호 김종익에 관한

     

    짤막한 국악계 문헌의 기록이다.

 

2) 당시 국악계는 앞서 설명 된 바와 같이

  

    1905년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으로

   

    원각사가 폐지된 후 속수무책으로 세월을 보내다

  

    1920년 전국 주요 도시에 예기조합 또는 권번이 생기면서

 

    국악후진양성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3) 1935년 순천 부호 김종익 선생이 거금 일만원을 투척

 

    조선성악연구회사무실을 건립 희사하여 활동비 까지 후원함으로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국악인들이 다시 결집(130여명)

 

    창극운동의 전개와 후진양성이라는 목표하에

   

    직속 극단으로 창극좌(춘향전)를 조직 하고

  

    전원이 총동원 되어 전국순회공연 펼쳤다.

 

4)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이 재력이 없어

  

     창극단을 만들지 못 할 것이라고 방심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창극단이 조직 되어 전국순회공연으로 군중집회를 가짐으로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39년 문화 활동의 모든 체제를 정비 한다는 구실 하에

 

     1940년 4월 창극단체를 연극협회에 소속시켜 경무국이 관장, 관리케 함으로

 

     활동 4년 만에 해산에 이르렀다.

 

5) 이상과 같이 순천 김종익 선생이 어떠한 사유로 그렇게 큰돈을

 

    국악인들을 위하여 희사 하게 되었는지 

 

    또한 조선성악연구회가 어떤 연유를 가지고 해산이 되었는가를

 

    생생한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정광수 선생과 대담 녹취 내용 ―

 

대담장소 : 2003.7.15(화) 17:30~18:30 (정광수 옹 자택)

 

대담인 : 이태호(『판소리』 세계무형유산 등록추진 협의회장)

 

녹취인 : 정광수 (『판소리』 무형문화재 제5호 '수궁가' 보유자)

 

* 본 대담문은 2003.7.31일 순천에서 개최되는 『판소리』유네스코 무형유산 등록을 대비한 세미나 (벽소 이영민 선생 『판소리』정립)에 참석을 하지 못하게 된 정광수 선생과의 대담을 녹취한 것임.

 

 

〈녹취내용〉

 

이태호 - "정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정광수 - "먼 곳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

 

이태호 - "정선생님이 순천 국악선생으로 계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정광수 - "1932년부터 1935년 ... 한 3년 있었지요."

 

이태호 - "정 선생님 가시기 전에도 순천에 국악원이 있었습니까?"

 

정광수 - "국악 판소리는 1:1 전수교육입니다.

              

               순천에 국악인 하면 오태석, 오끗준, 박초월 등등

              

               그 당시 많이 배출되어 있었어요.

               

               그분들이 어떻게 배출이 되었겠습니까?

              

               판소리 전수교육은 1~2년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수십 년 지역에서 판소리가 저변 확대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순천 국악은 1~2백 년 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순천은 예로부터 관기가 있어 음악이 성행한 곳으로

         

               더욱 뿌 리가 튼튼하지요.

 

               국악 가르치는 사람들을 기록을 하지 않아 묻혀버렸다는 것이지요.

      

               순천 판소리의 뿌리는 우리나라 국악 판소리 뿌리와 맥을

      

               같이 봐야합니다."

 

이태호 -"순천 국악교육이 선생님이 가신 1932년 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정광수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국악원 선생으로 갈 때는 그 지역에

 

              국악이 활성화 되어 있어 수요자의 요구가 있어서 가는 것이었지

            

              기초교육 보급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태호 -"그때 순천에서 봉급을 받으셨습니까?"

 

정광수 - "그때 봉급을 관에서 주는지, 돈 많은 부자들이 주는지,

   

               특별히 나오는 곳을 나도 모르게 관행처럼 내려오고 있었는데

    

               관리운영비가 지역 유지들한테서 협찬금이라 할까?...

      

               부족하면 순천군수가 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이태호 - "순천 계실 때 벽소 선생님께서 사진을 찍어주셨는데 기억하십니까?"

 

정광수 - "그럼요. 그 사진이 가보 1호입니다."

 

이태호 - "벽소 선생님과는 친하게 지내셨습니까?"

 

정광수 - "친한 사이보다 스승과 제자 같은 사이였어요."

 

               선생이 나보다 27살 위였고 학문과 식견이 보통사람들은

 

               따라 갈 수가 없이 높으신 분이였어요.

 

이태호 - "벽소 선생님과 가까이 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정광수 - "선생은 독립 운동가였어요. 애국지사지요.

       

               서울에서 여운형, 조소앙, 이인, 정노식 같은 분들이 자주 찾아왔어요.

 

               그때 마다 꼭 국악원으로 모시고 와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그래서 저도 그 훌륭하신 분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지요."

 

이태호 - "조선성악연구회와 벽소선생이 연관이 있나요?"

 

정광수 - "있고말고요. 하루는 서울에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 왔어요.

 

               같이 오신 분 중에 우석 김종익 선생도 왔고요.

 

               여럿이 이야기 도 중 국악인이 많이 있으니까

 

               왜 국악인들 이 이렇게 많이 있느냐고 얘기가 시작 되었지요.

 

               벽소 선생이 일제의 식민통치로 대중 집회를 갖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우리문화 말살정책의 희생물이 되어 이렇게 하 는 일을 잃고

 

               우리 순천으로 모여들어 소일들을 하고 있다고

   

               일장연설을 하신 것이었어요.

      

               벽소 선생은 말씀이 아주 웅변 식으로 달변가이십니다.

 

               그때 우석 선생이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국악인을 활용한 민족운동이냐?' 물었습니다.

 

               벽소선생은 서울에다 국악원 사무실을 마련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국악인들을 결집시켜 창극단을 조직케 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하게하여 우리 민족정기의 살아 움직임을

 

               국민에게 보이는 것이 시급하다 하신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우석선생이 '그럼 만 원 정도면 마련할 수 있겠느냐?' 하니까

 

               이동백선생이 '충분 할 것 같다.' 하니 우석 선생 이 즉석에서

 

              '내가 만원을 줄 테니 그렇게 하여보라!' 하셔서

 

              송만갑, 이동백, 한성준 세 사람이 그 날로 서울로 올라가

 

              익선동에 대지 500평, 건물200평을 구천 원에 샀어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태호 - "그 어렵사리 마련된 조선성악연구회가 왜 해산 되었는지요?"

 

정광수-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려놓고 전쟁 물자가 딸리니까

 

               우리 나라 물자로 전쟁을 치루기 위하여 전국에 있는 연예 단체들을

 

               경무국 산하로 통합 하고 경찰통제 하에 '황국신민 내선일체다'하고

 

               일본 앞잡이 노릇을 시키는데 그때 우리나라 연예 단체 뿐 아니라

 

               소위 지식인이다 하는 사람들이 더 앞잡이 노릇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본 앞잡이는

 

               되지 말자고 해산을 해버린 것이고 조선성악연구 회까지 해체 시키고

 

               청산위원을 정하였는데 나도 청산위원 한 사람이었어요."

 

이태호 - "그때 그런 애국정신이 어떻게 그렇게 강하셨습니까?"

 

정광수 - "우리 민속 국악 판소리가 민족혼의 소리 아닙니까?

 

                우리 국악인들이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면 우리 민족혼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국악인들이

 

                나라 민족 배신하는 것 보았습니까?

 

                국악 자체가 민족혼이 다 하는 것을 우리 국악인들은

 

                특별이 교육 안 받아도 소리 속에 담겨져 있어

 

                민족운동가가 된 것입니다.

 

                스스로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편단심 정신이 없으면 판소리 하지 못합니다."

 

이태호 - "벽소 선생이 항일 민족 운동가였다면 우석선생님은 당시 여건상

 

                많은 재산을 육영사업에 기탁하고 벽소 선생과 연계 하면서

 

                지내온 사이였다고 봅니다."

 

정광수 - "맞습니다. 그 두 선생님 말씀이 나왔으니까 말합니다만

 

                우리 국악인들이 부끄러워서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당시 순천 벽 소 선생님이 우리 국악인들이 오갈 때 없이 방황하고

 

                헤맬 때 전부 순천으로 몰려들었지요.

 

                왜 다른 지역도 있는데 순 천으로 왔겠습니까?

 

                그 증인은 제가 있습니다.

   

                벽소 선생님 은 국악 판소리를 우리 민족의 혼이라고

 

                생각하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석 선생으로 하여금 조선성악연 구소의 필요성을

 

                더욱 역설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태호 - "그때 그러한 상황들이 지금 국악인이나 국가에서

 

                얼마나 아는 분이 있습니까?  기록이 없으니까요."

 

정광수 - "지금은 다 물론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당시 사람들 이 있었는데

 

                아쉬운 것이 국악에 대한 기록들을 소홀히 하기 때문인데

 

                정부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태호 -"조선성악연구회 활동상황은 국악사에 기록 되어져야 할

 

               국악인들의 민족 해방운동이었는데 그렇게 중요한 업적들을

 

               국악협회같은 단체에서 왜 방치 하고 있나요?"

 

정광수 -"그래서 부끄럽다는 말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인데 젊어서는 다음 기회가 있겠지 하고 넘어가고

 

               지금은 늙어 활동할 힘이 없고

 

               죽기 전에 밝혀 놓을 것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일들을 누가 그렇게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끄럽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네요."

 

이태호 -"오늘 선생님의 말씀으로 묻혀 질번한 중요한 내용들이 밝혀졌습니다."

 

정광수 -"이 선생이 꼭 기록으로 후세에 전해 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이태호 -"순천에서 인물 자랑 하지마란 속담이 있는데

 

               언제부터 인지를 알 수 없는데 혹시 선생님 들어 보셨는지요?"

 

정광수 -"그건 그 당시 벽소선생님을 찾아오신 선생들을 모시고

 

               식당에 가면 형편이 곤란 하니까 식당 반찬이 들나물로 순천에는

 

               고들빼기가 많지 않습니까?

 

               생김새가 인삼 비슷하잖아요.

 

               아침이나 저녁이나 식사 때마다 나오니까

 

               이분들이 서울 회의 때 순천은 부자들이 많아

 

               인삼으로 반찬을 해 먹어 여자들이 다 미인이드라 했다 해요.

 

               벽소선생님 말씀이지요.

 

               이 회의 때 나온 말이 인물자랑 하지 말라고

 

               외부에서 일컫게 된 것입니다."

 

이태호 -"순천 세미나에 선생님이 꼭 참석하시어 생생한 증언의 말씀을

 

               많이 들려 주셨으면 좋을 것인데 못 오시게 되어 아쉽습니다.

 

               세미나를 계기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저에게 하십시오."

 

정광수 -"이 선생 말씀대로 우리 『판소리』가 세계무형문화유산이 되고

 

               벽소 이영민선생의 업적이 복원된 것을 보고 죽으려고

 

               이렇게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기원 합니다."

 

이태호 - "더 하실 말씀이나 후세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정광수 - "우선 순천의 발전을 기원하고 순천이 국악의 고장이고

 

                발현지이니 관에서 적극 지원하고 장려, 진흥함으로써

 

                한 차원 더 높은 세계로 발전 계승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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