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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고수의 중요성과 뛰어난 기량 - 노재명 (국악박물관 관장)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0-06-09 조회수|6,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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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노재명 저서 [명창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본 판소리 참모습](서울:나라음악큰잔치 추진위원회, 2006년) 112~118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사진 왼편은 명창 박록주의 제자 이옥천(이등우)의 판소리 장면(1980년 무렵, 이옥천 제공).

 

오른편은 판소리 명고수 김명환의 멋들어진 자세. 판소리 북반주시 그의 자태는 웬만한 무용보다 아름다웠음.

판소리 명고수의 중요성과 뛰어난 기량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시대별로 뛰어난 명창이 있었고 그에 걸맞는 유능한 고수가 반드시 있었다.

성악이 주가 되는 것이 판소리이지만 고수도 그 이상 중요하다. 아무리 천하의 명창이라도 고수 반주가 형편 없으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고 소리꾼의 기량이 다소 미흡해도 고수가 뒷바침을 잘 해주면 단점이 보완되고 본래의 공력 이상으로 소리를 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예부터 그러한 고수의 중대함을 강조하는 의미로 ‘일고수 이명창’, ‘암고수 숫명창’이라는 말이 있었고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명고는 없다’ 했다.

 

노래는 어린 꼬마도 재능 있고 열심히만 배우고 노력하면 애기 명창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소리를 반주하는 고법은 혼자서만 수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가들의 판소리를 반주한 경험이 무수히 많이 쌓여야 비로소 명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소년 명고는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판단과 인식은 판소리에 대해 아주 깊이 파고 들어간 귀명창, 명창 등 전문가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그냥 호기심과 일시적인 흥미로 관람하는 청중이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사람들한테는 명창만 눈에 들어오고 고수는 대체로 중요한 인물로 비춰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북솜씨가 뛰어난 고수였더라도 고종 이전의 명고수들의 이름과 면모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전해오는 바가 거의 없다.

 

예부터 명창과 고수에 대한 사례와 대접 차별이 아주 심해서 고수들은 불만과 한이 많았다. 공연 사례금은 물론이고 때로는 밥상까지도 극심한 차별을 두어 대했고 이런 까닭에 고수 노릇을 하다가 괄세와 차별을 떨쳐 버리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명창이 된 고수들도 많았다.

 

순조(純祖) 때 송광록은 친형 송흥록의 고수로 '활동하다가 다년간 소리를 수련하여 명창이 되었고 순조 때 주덕기도 송흥록, 모흥갑의 고수로 있다가 명창이 되었다.

그 다음 세대에서는 이날치가 줄타기를 하다가 그만두고 명창 박만순의 수행고수로 활동하다 고수로 하대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입산 독공하는 한편 서편제 시조 박유전한테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다.

 

구한말∼일제 때 장판개는 송만갑 등의 수행고수로 그 명창들의 판소리를 다 외울 정도로 오랫동안 같이 활동을 하다 보니 판소리를 할 줄 알게 되고 그 소리를 다듬고 따로 또 판소리를 배워서 명창이 되었다.

 

예전에는 판소리 명가문 출신이거나 특별한 인맥이 없으면 스승, 선배들이 소리를 잘 안가르쳐 주었고 판소리 다섯바탕 가운데 한 바탕이라도 떼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또 아무런 소리 체험도 없이 무작정 산속에서 자기 혼자 몸부림친다고 득음이 되는 것도 아니어서 대명창의 머슴 생활을 하다시피하여 어깨 넘어로 소리의 이치를 터득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배워서 명창이 된 사례가 많다.

 

그리고 명창으로 활동하다가 목이 손상되어 고수로 행세한 사람도 있다. 일제시대∼1950년대 고수로 활동한 김세준,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김동준 등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고음반 등의 자료를 통해서 보면 예전 고수일수록 추임새가 많지 않고 고법이 화려하지 않고 담백하며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핵심만 딱딱 짚어 나가는 형국이고 그러면서도 기품이 있다.

 

판소리 고법에 대한 이론과 기교가 증가한 것은 고종 때 들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그 기교의 도가 지나쳐서 고수의 반주가 소리의 흐름과 법도에 맞지 않고 제 멋에 겨워 관중에게 자기를 호소하기 위해 제 북가락을 마음대로 친다고 하는 명창들의 불평이 나오기도 한다.

 

고종 말기와 일제 때의 전문적인 명고수로는 강경수, 신찬문, 박판석, 오수관, 오성삼, 주봉현, 신고주, 한성준, 이흥원, 지동근, 정원섭 등이 있었다.

신고주(申高柱)는 고종 때의 고수로서 경상남도 진주 태생이며 5년간 판소리 명창 박기홍의 수행고수로 활동했다.

 

판소리 연구서 [창악대강](서울:국악예술학교 출판부, 1966년)을 집필한 박헌봉이 1925년에 신고주한테 판소리 고법을 사사했다 한다.([박헌봉 華甲 및 出版 紀念-頌壽集] 서울:기산박헌봉선생회갑기념사업회, 1966년, 18쪽)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외조부 백운채에게 북, 장고 장단과 춤을 배웠다 하며 14세 때에는 서학조에게 줄타기, 땅재주를 3년 동안 배웠다 한다. 그리고 박순조 문하에서 고법 기예를 완성했다 한다.

한성준은 20세 무렵부터 창우회에서 공연 활동을 했고 신급제 유가에도 참가한 바 있다. 창우집단의 공연이 거의 없어진 후에는 유랑 공연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03년부터 서울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41년에 작고할 때까지 40여년 동안 고수로 대단한 활동을 했으며 판소리 고법 외에 승무, 살풀이, 학춤 등 무용으로도 유명했다. 한성준은 판소리 반주 외에 기악 장고 반주도 많이 했고 피리 연주 음반(Columbia 40393-B 피리시나위, Victor 49064-A·B 합주 신방곡 등)도 남긴 바 있다.

 

한성준은 일제 때 거의 모든 명창들의 판소리 반주를 대부분 혼자서 도맡았다. 김소희의 증언에 의하면 한성준은 일제 때 국악 음반, 방송 기획을 뒤에서 주도하였다 한다.

한성준은 음반 취입, 공연, 방송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도 틈틈히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한성준의 고법 제자는 40여명이며 무용 제자는 무려 200명 가량 된다 한다.

 

정원섭(丁元燮)은 판소리 명창 정정렬의 아우로서 판소리 고수이자 피리 연주자였고 북, 장고, 피리 반주와 남도민요 창을 유성기음반에 녹음한 바 있다.

일제시대 말기 이후에는 김재선, 이정업, 김명환, 김득수, 김동준, 한일섭 등이 명고수로 활동하였다.

 

김재선(金在先)은 1899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한성준한테 판소리 고법을 익혔고 광일창극장, 국극사단장, 아리랑국극단장, 대한국악원 이사, 전국국악인친목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일정 때 일본, 중국 순회 공연을 하였고 1950년 예술상(대통령상)을 수상했다.(국악예술인명감편찬위원회 편저 [국악 예술인 명감] 서울:국악계사내, 1961년, 131쪽)

 

이정업(李正業:예명)의 본명은 이산준(李山俊)으로 1908년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와리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나 1975년 타계하였다.

이정업은 피리, 해금, 호적, 북의 명인인 조부 이승룡과 부친 이태평(이태산)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국악을 익혔다. 그리고 이정업은 임흥문에게 해금을 배웠고 김관보, 이봉운에게 4∼5년 동안 줄타기를 익혔다.

 

이정업은 1930∼1960년 중앙방송국 전속 국악합주단원으로 활동하였고 한국, 일본, 만주에 줄타기 공연을 하러 다녔다. 1961년 강원도 원주 공연에서 줄타기를 하던 중 줄을 맨 말뚝이 부러져 다리를 다쳐 줄타기를 그만 두고 고수로 활동하였다.

이정업은 1960년대 초반∼1970년대 초반 신세기레코드사와 지구레코드사 등에서 판소리, 민요 음반에 고수로 참가하여 취입하였고 판소리 인간문화재 김연수의 수행고수로 활동하였다.

이정업은 1970년 판소리 고법으로 서울신문 문화대상 기악 부문상을 수상하였고 1960년대 후반∼1974년에 김연수, 오정숙 판소리 발표회에서 북반주를 하였다.

 

김명환(金命煥, 아호:一山)은 1913년 전남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에서 만석꾼 부자인 아버지 김용현과 어머니 명사현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김명환은 1918∼1919년 무렵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송만갑, 장판개, 김정문 등의 명창이 어느날 옥과에서 부자집으로 소문난 김명환의 집에 초청되어 가서 판소리를 했는데 이를 계기로 김명환은 판소리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김명환은 1929년 혼인 후 처가집에 놀러갔다가 북 못치는 일로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이를 계기로 김명환은 북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이 해 겨울에 장판개를 찾아가 북과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김명환은 1929∼1932년 옥과의 장판개에게 고법과 심청가 등 판소리를 배우는 한편 신찬문, 박판석, 오성삼, 주봉현 등에게 북을 사사했다.

김명환은 1932년 글 공부보다 북 학습에 취미가 있어 계속 북 공부에만 몰두하여 형에게 여러번 매를 맞기도 하였다. 한편 김명환의 집 사랑에는 송만갑, 유성준, 장판개, 박봉래, 김정문, 공창식, 김봉학, 박중근 등 여러 명창들이 드나들며 판소리를 했는데 김명환은 1932년에 처음으로 자신의 집 사랑에서 북반주를 했다.

 

김명환은 1932∼1935년 송만갑이 이끌던 단체 ‘대동극단’에 입단하여 김정문, 조학진, 강남중, 이화중선, 김추월, 박금선 등과 공연을 다녔다. 1933년 무렵 김명환은 전라도 광주에서 이동백의 판소리에 북반주를 했고 비슷한 시기 구례 화엄사에서 열린 명창대회의 정정렬 판소리 공연 때 북반주를 했다. 1933∼1934년 무렵 김명환은 옥과에서 열린 임방울의 수궁가 공연 때 북반주를 하여 공식적으로 데뷔했다.

 

김명환은 1930년대 초∼말에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했는데 북반주 연습을 하기 위해서 잔치상 차리고 쌀, 돈 등으로 사례하며 이동백, 송만갑과 같은 대명창들의 소리 반주를 하여 북을 익혔다.

김명환은 1936년 무렵 여관과 이선유의 집에서 이선유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김종길의 집에서 북을 익혔다. 1937년에는 전도성의 판소리에 북반주를 했다.

 

김명환은 1953년 성우향을 명창으로 길러내려고 정응민에게 데리고 갔다. 1953∼1957년 약 4년 동안 김명환은 정응민이 소리를 가르치는 방에서 북을 치며 정응민의 집에서 기거했다.

1969∼1974년 무렵 김명환은 함동정월과 함께 살면서 함동정월의 최옥산류 가야금산조를 북반주 하며 예술적 교류를 가졌다.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활동하다 1989년 작고하였다.

 

김득수(金得洙, 본명:김영수)는 1917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채두인, 박동준, 오수암, 송만갑, 김세준(김창룡 아들)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오정숙과 박봉선의 증언에 의하면 김득수는 풍채가 근엄하여 창극 춘향전에서 운봉 영장 역을 잘했고 창극 장화홍련전에서는 배좌수 집안의 노부 역을 잘했다 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판소리 명창으로 행세하기 보다는 고수로 나섰다. 좋은 목을 타고 나지 못한 김득수는 고수로 변신하여 결국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득수는 김명환, 김동준과 함께 고법 인간문화재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990년에 작고하였다.

“시끄러우니 뭐니 해도 역시 김명환 북이 최고다”라고 하는 명창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김동준이 박진감 있고 소리꾼의 심정을 잘 헤아려 반주한다” 하고 어떤 소리꾼은 “나즈막하고 차분하게 반주하는 김득수의 북이 소리하기 편하다”고 말한다.

 

김동준(金東俊)은 1925년에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났다.(호적에는 1928년 출생으로 되어 있다.) 1938년에 박동실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박봉술과 김연수에게도 판소리를 배웠다.

1950년대에 전주와 이리에 국악원을 설립하는 등 다방면으로 국악 활동을 했다.

 

1967년에 동아방송에서 김연수가 판소리 다섯바탕을 녹음할 때 북반주를 한 바 있고 1970년 무렵에는 아예 소리를 그만두고 고수로 나섰으며 결국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문화재관리국에서 보존용 녹음을 할 때 박록주의 판소리 반주를 도맡아 녹음하는 등 여러 명창의 음반에 고수로 참여했다.

그리고 김동준은 호탕하고 박진감 넘치는 북반주로 1980년대에 완창 판소리 공연장에서 각광을 받은 바 있다. 1990년 김동준의 타계로 고법 인간문화재 김씨 3인방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한일섭(韓一燮)은 1929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한일섭은 명창 남해성의 남편이며 명창 성창순의 외숙이다.

한일섭은 어려서 한일섭의 매형이자 성창순의 부친인 성원목에게 판소리를 배운 바 있다. 그리고 태평소, 아쟁, 판소리 북 등 여러 악기에 두루 능했고 신민요를 작곡하기도 했다.

한일섭은 지구레코드, 힛트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창극 반주 등을 맡아 음반 취입을 했고 수많은 공연, 방송 활동을 하다가 1973년에 아깝게 요절하고 말았다.

2007-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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