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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소리 유래에 대한 의견 - 이태호 ((13년1월8일 - 보성군청 주최 세미나 발표글)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3-01-25 조회수|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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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편제 와 보성 판소리      

 

【사】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판소리 진흥회 이사장 이 태호

 

▮국악판소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생 되여 민족전통 국악으로 자리 메김 되어져 애호 되고 있는지 기록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1392년 조선조 개국이념인 사대주의 농본주의 신권주의에 의한 신(왕)권 사회계급 신분제도하에서 사회 개혁이나 민중들의 담론으로 도출된 사회문제 주창들은 왕권을 농락한 불순 반역도당 행위로 간주되어 3족이 멸해지는 엄벌정책에 사회개혁의 민중역정문화는 기록되어지지 못하고 구비전승 되어진 것으로 판소리가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 근래 사회과학의 발달로 판소리의 사설들을 분석 검토하여 본 결과 풍자. 해학. 미화. 비판. 성토가 주요골격으로 민족역정 민족심성 민족정기가 고스란히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것으로 우리민족은 사대주의에 항거 사회 개혁에 몸부림치는 문화가 있었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는 것이다.

 

1. 고증된 기록 서편제 와 강산제

 

▮구비전승 된 판소리의 최초 기록은 1940년 정 노식 “저” 조선창극사로써 그 후 문헌 기록들은 조선창극사를 인용한다. 라 하고 있다. 그와 같은 조선 창극사에 서편제는 보성 거주 박유전의 초기 소리제를 말하는 것이고 강산제는 그의 후기의 세련미가 가미된 소리제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음으로 국악사로써 정립이 되어있는 것이다

 

2. 보성소리의 유래 출현

이상과 같이 박유전의 서편제와 강산제는 오랫동안 그의 후진들로 하여금 전수 전승되어 오던 어느 날 정회천 전북대학교 국악과 교수의 “저서” 보성소리의 유래가 발표 되면서 국문학 민속학 판소리 학계가 새로운 학설을 발견한양 교육애 활용하기 시작이되고 보성군 행정에서 보성소리가 학설로 정립됨을 반기면서 홍보자료로 자랑스럽게 활용하는가 하면 국악계나 서편제 강산제 전수 전승 계보에 있는 국악인들 또한 이론이 없다고 반겨 활용함으로 보성소리의 유래가 국악사로 자리 메김 되어져 가는데 보성의 자랑이요 자부 심과 긍지로 삼아지기를 바라지 않은 군민 또한 어찌 있었을 것인가‽

 

3. 보성소리의 유래에 대한 관심사

 

1. 필자 또한 보성출신이다 1980년대 영. 호남. 호남대. 비호남 . 왕따. 지역감정 충돌 등에 격분하지 않은 호남인이 없었을 것이다. 이따위 나라 망쳐먹는 지역주의가 구국의 길 인양 예속식민 보수주의 매국노들의 발악하는 망동거지로 훗날 민족통일 역정에 반적 도당들의 역사적 심판을 두러워할지 모르는 치한들의 행동거지에 젊은 열정을 바쳐 호남의 정체성 문화 찾기에 힘을 모으고 있던 차에 당연 호남 문화인 판소리 연구도 그 한 과정에서 보성소리의 유래가 관심사에 들어 온 사건이었다.

 

4. 보성소리의 유래 검증

 

. 보성소리 유래에 대한 검증을 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한 것이 정응민의 상경 시기었다. 1900~1910년의 단계가 대원군사망 민비시해 청일전쟁 아관 파천 러일전쟁을 거쳐 조선 조정을 장악한 일제는 우리조정에 굴복을 강요하여 굴욕적인 한일 병탄이란 민족의 수모요 오욕으로 점철되어진 비극적 시기라는 것을 삼척동자의 눈앞에도 어른거리는데 어찌 그 기간에 대원군 사랑에서 소리공부를 했으며 대감들과 접촉 한학을 공부했다니 우리 조정 대감들의 낭만적 생활상이 타이타닉호 침몰사건을 연상케 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 민족성의 숨겨진 철학관을 캐낼 수 있을 것 같은 큰 기대감으로 흥분되고 말았다.

 

5. 정회천 교수의 보성소리 유래

그럼 정 회천 전북대학교교수의 보성소리의 유래를 보자

 

a. 정응민(1896~1964)은 7세 1903년 그의 백부 정재근의 손에 이끌려 20살이 되기까지 낮에는 윤판서 라고만 알려진 어영대감 집에서 한학을 공부 하고 밤에는 대원군의 사랑에서 소리를 연마했다. 그때 정재근의 소개로 이동백을 소개 받아 중고제와 접하게 된다.

 

b. 그러는 동안 나라가 망하고 박유전 또한 스스로 생을 마치게 되자 정 응민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보성군 회천면 도강마을로 내려와 정착하게 된다.

 

c.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전라북도 부안에서 고종때 명창 김찬업에게 동편제배우고 이동백에게 중고제 박유전에게 서편제를 배워 어울려 융합된 소리로 탄생 시킨 것이 보성소리인 것이다.

d. 박유전의 소리는 보성의 정씨 문중에 전승되고 있는 소리와는 차별성이 있는데 이는 정재근과 보성소리를 완성시킨 정응민에 의한 소리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때 보성소리는 기존의 강산제에 이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김세종제 춘향가를

융합시켜 그것도 다른 두 소리가 그냥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소리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리는 오늘날 가장 많이 불리워지는 판소리 유파 중의 하나로 세련미가 있으며 정재근 과 정응민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 된 정권진 (1927~1986) 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전승계보를 이루면서 보성소리라는 판소리 “바디” 한 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e. 박유전은 대원군의 사랑채에서 소리를 연마하다가. 대원군이 실각하자. 전남 나주

내려와 정재근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정재근에게 소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때 정재근은 박유전으로부터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 춘향가를 배웠으며 박유전은

대원군이 득세하자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 대원군의 사랑채에 머물며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 뒤 박유전은 대원군의 죽음과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비관한 나머지 생을 마치게 된다.

 

p. 서편제 고증조사

보성군은 1994.4.25~5.14 박유전 행적에 대한 고증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자들의 보고서는 보성읍 대야리 강산마을과 회천면 영천리 도강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의견들을 종합한 내용들 이었다.

 

g. 남도 판소리 심포지엄

남도 판소리 심포지엄: 일시:1994.11.19일 (토)오후2시 장소: 보성군청 회의실

▣사회 : 정회천 ▣ 발표자: 보성소리의 유래특성 이보형⁄문화재전문위원 ▣서편제의 계보 에 대하여: 임성래⁄순천대학교교수 ▣보성소리의 판소리적 지향: 최동현⁄군산대학교교수의 발표로 모든 수순을 학술적 지역적 사회적 검증 절차를 밟았다고 정리한 것이다.

 

7. 보성소리 유래 검증

 

1964)은 ⓵ 7세 1903년 그의 백부 정재근의 손에 이끌려 대원군의 사랑에 있는

박유전에게 소리를 배우러 갔다

20살이 되기까지

⓷ 낮에는 윤판서 라고만 알려진 어영대감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밤에는 대원군의 사랑에서 소리를 연마했다.

⓹그때 정재근의 소개로 이동백을 소개 밭아 중고제와 접하게 된다.

 

문제된점

 

⓵ 정응민 7세 1903년은 대원군생몰(1820~1898)으로 사망 5년이 지나고 정응민 2살 때 사망하고 없었던 것으로 박유전이 어찌 그 사랑채에 있었을 것인가.

역사, 허위 왜곡이며 정응민이 서울에 가지 않았음을 증거한 위장 날조 자작극임을 증거한다.

 

⓶ 정응민 20살 1916년은 대원군사망 18년이 지난해이며 박유전이 사망된 년도로써 박유전이 서울 대원군 사랑채에서 죽었음을 확실히 말해주고 있는 중요한 증언이다.

이 또한 역사왜곡 허위날조 자작극 시나리오이다.

 

⓷ 낮에는 윤판서에 한학을 공부하여 보성소리에 충. 효. 열이 담겨 있다는 내용인바

한국 현대사를 보자 1900~1910년은 실질적 조정 실권은 우리조정에서 갖지 못하고 청. 러. 일에서 좌우했던 시기로 조정 대감님들이 연명 유지에 쥐죽은듯 복지부동으로 목덜미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시기에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꾼 공부인가.

이 또한 역사왜곡 허위 위장 날조 자작극 시나리오이다.

 

⓸ 밤에는 대원군의 사랑에서 박유전에게 서편제소리를 연마했다는 것인데 대원군이 없는 시랑방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박유전도 거기 없었다. 이 또한 역사왜곡 허위위장 날조 자작극 시나리오이다.

 

⓹ 그때 정재근의 소개로 이동백을 만나 서울토리 중고제를 배웠다.

서울 대원군 사랑에 가지 않았음으로 이동백을 대원군 사랑에서 만날 수 없는 것으로

이 또한 허위 위장 날조 자작극 시나리오이다.

 

제b번 문제

그러는 동안 ⓵ 나라가 망하고 박유전 또한 스스로 생을 마치게 되자 정응민은 ⓶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보성군 회천면 도강마을로 내려와 정착하게 된다.

 

문제된점

 

⓵ 나라가 망하고 1910년 한일병탄을 말하는데 정응민은 14세가 된다 제1문제 전항과도 일치되고 있는 것으로 이 또한 역사왜곡. 허위 위장날조 자작극이다.

 

⓶7세에 올라갔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와 보성에 정착했다는 것에 대하여는

7세 1903년에 서울에 갔다는데 허위가 명백함으로 사실이 성립되는 부분이 없다.

허위날조 자작극 시나리오이다.

 

제c번 문제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전라북도 부안에서 고종때 명창 김찬업에게 동편제를 배우고 이동백에게 중고제, 박유전에게 서편제를 배워 어울려 융합된 소리로 탄생 시킨 것이 보성소리인 것이다.

 

문제된 점

서울에 갔다는 자체가 허위날조 인 것으로 내려오던 중 전북 부안 김찬업에게 소리를 배우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 이동백에게 서울토리 중고제도 배울 수 없었으며 박 유전에게 서편제 소리도 배우지 않았다고 결론할 수 있는 것으로 어울려 융합된 소리가 탄생될 수 없는 것이다. 박유전의 서편제 강산제 탄생 배경을 도용한 것으로 진실을 은페 시켜 허위 날조한 위장 자작극 시나리오이다.

 

제d번 문제

 

4. ⓵ 박유전의 소리는 보성의 정씨 문중에 전승되고 있는 소리와는 차별성이 있는데

이는 정재근과 보성소리를 완성시킨 정응민에의 판소리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때 보성소리는 기존의 강산제에 이 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김세종제 춘향가를 융합시켜 그것도 다른 두 소리가 그냥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소리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에 의의를 둘수 있을 것이다. 이 소리는 오늘날 가장 많이 불리워지는 판소리 유파 중의 하나로 세련미가 있으며

 

⓶정재근과 정응민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 된

정권진(1927~1986)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전승계보를 이루면서 보성 소리라는 판소리 “바디 한 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제d번 문제된 점

 

⓵ 박유전소리 서편제와 강산제는 보성 정씨 문중에 전승되고 있는 소리와 차별성이 있다 의문제점은 정재근 과 정응민의 소리변화로 이루어진 것으로 박유전의 소리 계승차원이 아님을 밝히는 주장으로 서편제 밎 강산제 와 보성소리는 별제임을 주장하기 위한

수순일뿐 정재근 과 정응민은 독특한 소리 맥을 형성할 정도의 당대의 소리꾼으로 명성을 널리 알려지고 있는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박유전의 서편제 강산제가 탄생케 된 스승의 행적을 도용한 음흉함의 실체를 드려내 놓은 결정판으로.

 

⓶ 정재근 정응민 정권진 으로 이어진 신흥계보에서 탄생시켰다고 하는 보성소리의 탄생 과정을 자칭 논리적인 학설로 위장시켜 최종 목적지에 도달시켜놓은 것이다.

역사를 왜곡 시키지 않고 사실을 은폐 허위 날조로 자작극 시나리오가 아니었으면 오직 좋았으리요 만 .

 

제e번문제

 

박유전 의 보성관련

 

⓵ 박유전은 대원군의 사랑채에서 소리를 연마하다가. 대원군이 실각하자. 전남 나주 에 내려와 정재근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정재근에게 소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때 정재근은 박유전으로 부터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 춘향가를 배웠으며

⓶ 박유전은 대원군이 득세하자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 대원군의 사랑채에 머물며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뒤

⓷ 박유전은 대원군의 죽음과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비관한 나머지 생을 마치게 된다.

 

문제점

 

⓵ 박유전은 보성에 오지 않고 순창에서 서울로 직접 간 것으로 대원군 실각 1882 ~ 1885년은 박유전(57세~60세) 은 서울에서 나주로 내려와 정재근에 소리를 가르첬다.

 

⓶ 대원군이 다시 득세하자(1885년)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 대원군의 사랑채에 머물며

소리를 했다.

 

⓷ 박유전은 대원군의 죽음(1898년)인가 나라의 위태로움(나라가 망함 1910년)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혼동) 생을 마치게 된다함으로 (1906년)도를 지적하고 있음

 

위 주장들로 박유전이 보성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밝힘으로 보성과 박유전은 아무 관련성이 없음을 강조했다. 박유전의 죽음까지 옆에 있었음을 정재근⇨정응민 구전 알림 정권진 ⇨ 정회천으로 박유전에 대하여 이 이상 측근이 없었음을 여러 경로와 상항을 들어 보성 관련성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은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는, 보성소리의 유래에 보성 서편제와 강산제 명칭부여 사용에 이론이 발생케 되는 것인바, 본 사건 자체가 역사를 왜곡하고 사실을 은폐하면서 허위날조 위장 자작극 시나리오 로 범죄적 행위라고 결론

지울 수 있다.

 

제 f 번문제 서편제 고증 조사 용역

 

⓵보성군은 1994.4.1~5.14일 서편제 고증 조사 용역을 ▣이보형∕판소리학회장 (중앙문화재 전문위원) ▣백대웅 중앙대교수 ▣지춘상 전남대교수 (도문화재전문위원) ▣김영재 전남 대학교 교수(도문화재위원)에 의뢰 조사한바 있었는데

⓶ 보고서는 보성읍 대야리 주민과 회천면 영천리 주민들에 의견을 물었다.

 

문제된 점

⓵ 조사자들의 보고서는 보성읍 대야리 강산마을과 회천면 영천리 도강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의견을 물은 내용이 보고서로 채택 되어 있다. 이런데 7개월 후 보성소리의 유래 심포지엄에서는 박유전이 서울 대원군 사랑에서 죽었다는 것이 맞다고 열변이다. 이래서 사이비 어용이 아니고 또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제g 남도 판소리 심포지엄

남도 판소리 심포지엄: 일시:1994.11.19일 (토)오후2시 장소: 보성군청 회의실

 

⓵ ▣사회:정회천 ▣ 발표자: 보성소리의 유래 특성 이보형⁄문화재전문위원

 ▣서편제의 계보 에 대하여: 임성래⁄순천대학교교수 ▣보성소리의 판소리적 지향: 최동현⁄군산대학 교교수의 발표로 보성소리 유래 정착 성공 축제심포지엄

 

문제된점

⓵ 패널들의 면면은 보성소리 유래에 대한 정회천의 발표 논문이 새로운 학설의 발견인양 그 논문을 예찬 일면도로 심포지엄 발표문으로 인용하고 있다. 7개월전 보성군 발주 박유전 유적 조사에서 행적을 찾을 길 없다며 보성읍과 회천면에서 마을 노옹들에 의존한 사람들이 어용 사이비 교육자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⓶ 또한 보성군은 정회천으로부터 보성소리의 유래를 받아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런 군민의 세금을 낭비해 가면서 까지 허위요 위장으로 일관된 보성소리의 유래를 보성에 정착시키기 위한 불순한 음모에 넘어가 박유전 유적 찾기나 심포지엄이 무엇을 남겼는가.

양심을 가책이 있다면 부끄럼없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

 

8. 날조된 보성소리의 유래 허위의 실체들

 

a. 정응민이 가지 않은 서울로 스토리를 잡음으로 역사를 왜곡시켜야 했고 지적수준을 높이기 위한 포커스에 대원군 사랑과 대감 고위층 인물을 관련지어 허위 위장 날조된 시나리오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 시켜진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b. 박유전의 서편제 강산제를 보성에서 추방하고 정응민제 보성소리로 변장 정착시키기 위한 작업이 조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c. 필자와 이보영과의 질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이보형의 논지 발췌 판소리연구 제1 집 1989.12.27일 발행

 

내용: 박유전의 스승이 모흥갑이란 설이 있고 정권진(鄭權鎭의말씀) 또 모흥갑의

소리제나 박유전 소리제를 모두 강산제라 하는 점 (.....)은 정노식이 조선광대에서

서편제의 시조를 모흥갑이라 한 것과 일맥 상통한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한다.

 

d. 국악 대사전 장사훈저774P 판소리 경드름에 관한 연구(이보영)에서 모흥갑의 강산제를 동 강산제라 하는 것은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으로 이어진 강산제와 구분하기 위하여서라 하고 있다.

 

e. 정회천교수 또한 보성소리 유래에서 박유전과 모흥갑을 부상시켜 강산제의 일맥 상통을 주장함으로 정권진 정회천이 계속 불을 지피므로 사이비 어용학계에서 이를 여과 없이 받아 드려 오도함으로 사이비 지도층 인사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드려 사회 문제화 된 것이다. 그 구체적인 실체들은 다음과 같다.

 

9. 박유전 서편제 폄훼 사례

 

a. 예적비 폄훼 작시자 금호문화재단 부이사장 이강래와 면담내용

 

비문 내용 부분 발췌: 선생의 영화는 한때고∕ 말년은 고독하고 빈곤하셨으며∕ 사후 선생의 무덤조차 찾을 길 없으니∕ 인생유전이련가∕ 모흥갑 (牟興甲) 선생에게 배우셨으니∕ 독특한 창법을 창제 하시어∕ 강산제의 비조가 되셨으니∕ 서편제이면서 동편제에도 능하셨으니∕ 생략 1988.3.20일 이강래지음

 

아래사진은 보성읍 충혼탑 밎 박유전 예적비다.

필자는 1994.9.12일 오후2~3시 광주동구 동명동소재 금호문화재단 부이사장 이강래 와 일문일답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문 아태호; 보성읍 충혼탑 아래 보성 박유전 예적 비문을 작문 하셨다 했는데 맞습니까.

답 이강래: 그렇습니다.

문 이태호: 비문내용에 박유전 선생은 모흥갑 牟興甲 선생께 배우셨다고 하셨는데 그 근거 자료를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자료를 보여 주다.

답 이강래: 그때 그런 기록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지요.

문 이태호: 그 기록이 이 자료가 맞지요.

답 이강래: 그때 직원들이 초안 작업을 해온 것을 다듬어 정리한 것인데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문 이태호: 초안 작업을 해가지고 이런 내용으로 하였으면 좋겠다는 직원의 요청이 있었다라고 정리가 되는가.

답 이강래: 그렇게 보면 된다..

문 이태호: 그 원본 자료를 찾을 수 있을까요.

답 이강래: 찾는데로 보내주겠다.

 

예적비 전면

강산제 (江山制)판소리 예적비(藝蹟碑)

 

 

위 사진은 보성군 보성읍 강산마을에 있는 박유전 예적비

 

듣노라 저 第一江山∕판소리 마디마디 애련하고 恨이 맺혀∕ 처절한 감칠맛을 어이 한가하여 앞장서서 듣는 고야∕ 界面調 소리모아 묻어 들어 번지는데∕ 그일 그 넋을 위하여 길이 빛날 소리비 세우니∕ 「億劫을 지나도록 내 소리 받아 가거라」.

詩 文學 博士 孫 光 殷

예적비 뒷면

 

이곳은 판소리 江山制 始祖 朴裕全 先生 께서 1835년부터 1906년까지 살았던 곳 이다. 先生의 묘도 찾을 길 없고 오직 소리만 남아 「내 소리 받아가라고 허공에 떠돌 뿐 이다.

여기에 판소리 藝蹟碑 를 세운다.

 

건립추진위원회 위원 : 이을호 지춘상 이강재 안진오 김정호 박관주 문병식 손광은 박종면 정병헌 최덕원 최유식 조두환 김주호 박형준 이종신 차보욱 이화성 김명환 조상현 안채봉 박춘성 성우향 성창순

고문 : 문창수 명예위원장. 안재우

추진위원장 : 김중채

 

b.예적비 폄훼 작시 손광은 교수와 면담 내용이다.

일시: 1994.8.17일 장소 : 전남대학교 손광은교수 연구실

 

문 이태호: 강산마을 입구 박유전 예적비 시문을 지으셨는가.

담 손광은: 그랬다.

문 이태호: 박유전 강산제는 조선창극사에 岡山調인데 江山으로 江자가 바뀐 이유는

답 손광은: 전달 과정으로 볼때 岡은 1:1 이고 江은 1: 多 다량 함축으로 강산제라야 옳다.

 

질문 2번째

문 이태호: 비문 내용에 「내소리 받아 가거라」내용은 어디에서 근거 하였는가.

답 손광은: 현지 주민들의 유전을 듣고 그랬다더라 해서 썼다.

문 이태호: 박 황 판소리 200년사 및 전주대사습사에 권삼득 명창에 나오는 사연

기록인데 보셨는가.

답 손광은: 보지 못 했다 금시초문 이다.

문 이태호: 남의 사연 기록이 잘못 전해져 박유전의 예적시로 사용이 되어진 허구로

나쁘게 말하면 도용이 될 수 있는것 아닌가.

답 손광은: 권삼득이 그랬다 해서 박유전이 못하란 말 있느냐 괜찮다고 본다.

문 이태호: 판소리하는 사람 비문마다 그런 시구를 사용하여도 괜찮다는 말 같는데.

답 손광은: 관계 없다고 본다 하고 싶으면 하는 것으로 본다.

결        론: 작명은 목적의 전통과 역사가 전제 필수조건으로 종합하여 지어지는 것으로

1:多 나 또는 남이 먼저 사용하고 있는 기록이 발견되면 후자가 정정하는 것이 창피를

덜 사는 길 아닐까.

 

c. 보성소리의 유래 저자 정회천과 면담내용

일시 : 1994.6.31일 1:30~3:00장소: 전북대학교 정회천교수연구실

 

문 이태호 : 보성소리의 유래를 썼는가.

답 정회천: 그랬다 내가 썼다.

문 이태호: 그 내용에 박유전 활동지가 서울과 나주로 보성군과는 무관하고 있는데 맞는가.

답 정회천: 구전으로 들은 것을 정리한 것으로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다.

문 이태호: 인물 대조표를 보여 주면서 정응민선생의 서울 대원군 사랑에서 이렇게

오래 동안 있었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답 정회천: 잘못 되었다 구전을 정리한 것인데 잘못된 것 같다.

문 이태호: 이와같이 잘못 정리한 보성소리의 유래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되어 지고 있는데 그 책임 어떻게 할 것인가.

답 정회천: 앞으로 책임지고 차차 정리해 가겠다. 지적하여 주셔서 감사하다.

 

d. 순천대학교 최덕원 총장 면담내용

일시: 1994.8.16일 오후3시 장소:순천대학 총장실

 

문 이태호 : 귀교 남도문화연구(1993.5.31일) 제4집이 발간 되었지요.

담 최덕원 : 그랬다.

문 이태호: 그 4집 내용에 정회천 전북대교수의 보성소리 유래가 발표되고 있는데 보성소리 유래 논문에 대하여 검토하고 게재 하였는가.

답 최덕원 : 정회천은 정응민의 손자이기도 하면서 국문학 민속학 판소리 전문교수이기 때문에 우리 순천대학에서 그 논문에 대하여 검증 할 전문교수가 없어 그냥 올려 진 것으로 본다.

문 이태호 : 보성소리 관련 인물 대조표를 보여 주면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 하라 하였다.

답 최덕원 : 할 말이 없다 죄송하다 용서해주기 바란다.

문 이태호 : 최총장은 1988년도 보성에서 박유전 예적비 건립에 건립추진위원으로 박유전의 진실된 역사기록을 훼손시키면서 허위 가장 날조로 박유전명창을 폄훼 시키는 유적사업에 동참도 하였다. 교수 총장직분으로 잘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최덕원 : 부끄럽고 할 말이 없다. 죄송하다 용서를 빈다.

 

e. 유적사업 추진위원 안진오 교수와 면담내용

일시 : 1994.8.17일 오후4시 장소: 전남대학교 안진오교수 연구실

 

문. 이태호 : 보성 박유전 유적사업 추진위원이셨는데 알고 있는가.

답. 안진오 : 오래된 일 같은데 기억은 난다.

문. 이태호 : 인물 대비표를 보여 주면서 이렇게 역사를 왜곡시킨 후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충혼탑 아래와 강산마을 입구에 박유전 예적 비문 내용 인데 지금도 이의가 없다고 주장하시는지.

답. 안진오 : 검토 후 변명 같지만 그때 추진위원들은 이런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추진위 구성한다고 연락이 와서 지역에 좋은 일이면 고생하시는 분도 있는데

협조하는 차원에서 동의한 것이다.

문. 이태호: 본인은 이 모든 것이 역사왜곡 위장 허위날조로써 군민의 망신으로 보성군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건이라 생각하는데 이의 있습니까.

답. 안진오: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이런 자료를 보성 행정당국에서 보면 시정 되리라 본다.

문. 이태호: 학계에서 근대사쯤은 머리에서 항시 뱅뱅 돌 텐데 이것은 아주 오래 수 천 년전의 무슨 신화인양 이런 행태의 학계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답. 안진오: 학계가 다 그리하지 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은 없게 되었다.

이 태  호  : 솔직한 답변에 감사 드립니다.

 

10. 서편제 바로보기 책 출간

 

필자는 판소리 전문 학자들의 논지들의 신빙성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으로 「서편제 바로보기」 (주)한미어 1995년 374P가 출간 되였다.

본 책은 그동안 조사된 고증자료를 현지 확인 답사 검토를 거쳐 정리한 것으로 근대사의 왜곡과 허위를 배격하면서 진실을 양심껏 정리한 것으로 허위 위장 어용학계에 경종을

울리면서 잘못 기술된 보성소리를 정정하기 위한 고발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시중에 나도는 책을 본 언론에서 광주일보와 무등일보 문화담당 기자들이

찾아 왔다. 거두절미 하고  자신 있느냐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본 책자내용 대로만 기사화 해 버리면 큰 사건화 될 것이다라는 것으로

 

첫째. 학계를 사이비 어용 집단이라 했으니 학계에서 명혜훼손 법정 사건화 할 수  있다.

둘째: 정회천의 보성소리 유래를 역사왜곡 허위날조 자작극이라 했으니 이 또한 명예회손과 사실 규명 법정공방에서 진실이 밝혀져야 할 중대한 문제며.

셋째: 박유전 유적사업이 역사왜곡 박유전 보성 추방사업이라 하였음으로 기념비 문안작성자들과 항의 및 법정투쟁으로 진실을 가려야 하는 공방이 있을 수 있으며

넷째. 보성군 행정에서 진실을 가리려것인바. 자신이 있느냐 하는것 이었다. 다 자신

있다 하였더니 1995.4.25일자로 보도 되면서 상대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음으로 계속

4회나 기사화해 싸움을 부쳐놓아 사회 검증을 확실하게 받았다.

그로 인하여 국악계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는데 매진 해 줄것을 당부도 받았다.

 

11. 보성군 문화원의 진퇴양난 골칫거리

이와 같이 서편제 바로보기라는 사회 고발책이 출간되어 보성사회에 돌아다니게 되므로 김용환 보성군 문화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책을 보았는데 내용이 충격적으로 문화원장으로써 골치가 아파진다는 것이다. 보성의 현재 분위기는 정회천이 주장한 정응민의 창제 보성소리가 굳건히 정착되어져 있고 그 소리제로 보성소리 축제가 대통령 대상으로 지정 받아져 잘 운영되고 있는 것인데 이를 번복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는 것이 대체적인 보성의 분위기다는 것이다.

 

a. 토론회 제안

며칠 후 다시 문화원장에서 전화가 왔다. 정회천과 토론회를 개최 할테니 준비해서 참석 하라는 것이었다. 필자쪽에서 사회자 1인 토론자 1인 발표자 1인 정회천 쪽에서 발표자

2인 토론자 1인 계 6인을 페널로 하겠으니 준비하여 연락주라는 통첩을 내린다.

큰 죄를 지은 기분으로 수락을 하고 “사회자 (사회이슈 단골 사회자)박종환 도의원”

 “순천 대학교 조남훈교수 토론자” “필자가 발표자”로 하고 본 자료가 그때 토론

발표문으로 보성문화원에 제출 된 것이다.

 

b. 토론회 거부통보

본 토론 발표문을 상대방에게 알려주었는지 상대가 전문분야 토론은 현직 학자라야

응하지 학자가 아닌 이태호 일반인하고는 하지 않은다고 하므로 토론회가 성사되지

못 하고 무산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c. 서편제 보성소리축제 명명

토론회도 일방적으로 무산시킴으로 더 이상 진실규명 노력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된

보성군 문화원장은 문제된 점들에 대하여 대책을 논의 과정에서

⓵ 보성소리 축제의 유래 정응민 창제 보성소리는 허위 날조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한다.

⓶ 보성소리 축제 명칭 사용을 폐지하는 것이 시급 하다고 본다.

⓷ 대안으로 “서편제 보성소리축제” 로 정립하는 것의 당위성으로.

⓸ 서편제는 보성을 상징하는데 설명이 필요 없이 고증과 문헌이 보성거주 박유전의

창제로 기록되어 있는 것임으로 극히 자연스럽게 서편제뿌리의 고장이 보성임에 이의가 없다고 본다. 라는 결론이 있었다.

 

12. 역사왜곡 국제 박람회

 

a. 보성소리 유래의 출현은 역사를 왜곡하고 허위 날조 위장한 자작극 시나리오로 국제 박람회장을 방불케 하고 있는 쿠테타적 “亂“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b. 당사자는 욕심이 발동되어 이성을 잃고 눈이 가린체 불법을 범했다고 치자, 학계의 행태다. 정의 진리 양심을 사명으로 하는 교육자들이 그렇게 하나같이 주범에 적극 동조해 역사를 왜곡하는데 동행사 하고 있었다는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c. 행정당국이다. 대학교수의 주장에는 이의를 달 수 없다는 법칙이 있는가 필자의 시정 건의에 대학교수의 주장을 번복할 수 없다고 돌아온 회시에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d. 자칭사회 지도층 들이다. 이렇게까지 지역 현안 문제에 둔감 할 수 있을 것인가. 보성 군민의 자존과 명예를 실추시킨 중대 사안이었다. 섭섭함을 넘어 불쾌감을 금할 바 없다.

 

e. 박유전의 전수계보에 있는 국악인들에 묻고 싶다. 그들은 직속계보의 역사적 진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국악인들은 계보가 즉 생명을 의미한다. 이런 뒤죽박죽 추한 “비조탈취 난”을 보고도 어떻게 그렇게 말 한마디 없이 강건너 불구경이었다는 말 인가.

 

f. 서편제 보성 박유전의 소리로 1860년 전주 대사습 대회에서 얻어진 이름으로 그 이전은 소리제로 구분되지 않고 우조. 계면조라고 불리어지고 있었던 것을 박유전의 독특한

창법을 듣고부터 그 이전의 소리와 구분하기 위하여 박유전의 거주를 표준하여 동편제와 서편제라 하게 된 것으로 박유전은 서편제의 비조를 넘어 판소리 제를 탄생케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다.

 

g. 이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이 후손이 없다는 약점을 이용한 후계에서 난을 이르켜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괘 망칙스런 발상이 이런 혼동을 야기하게 된 것이다.

 

13. 민족음악 흥망성쇄

 

1) 서편제는 보성 박유전이 탄생시킨 제의 구분이다. 1860년대까지는 우조성. 계면조성 으로 제의 구분없이 창극조로만 불리워지고 있었다. 박유전이 1860년 전주 대사습사에서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심청가 소리에 요절복통으로 탄복한 관중들이 저 창자가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라고 소동이 벌어지면서 그 소리의 특출함에 계면조가락 지역이었던

섬진강을 중심하여 보성지역 인근을 서편제라 분류케 되고 반대 우조지역은 자동

동편제로 분리케 된 것이다.

 

2)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서편제에서는 비조가 박유전이다. 라고 문헌은 기록해주고

있는데 동편제는 비조는 없는 것이다. 그 뒤 중고제 (충청.서울)도 만들어져 내려오던

중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져 없어진지 오래고 동편제 또한 국민들로부터 점차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이제 겨우 20% 정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며 현제 불리워지고

있는 판소리 80% 가 보성 “서편제” “강산제” (계면조가락) 소리이다.

 

14. 건의사항 ⌈민족음악 성역화⌉

 

건의사항 1

 

이와 같이 보성은 민족음악의 성지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민족음악 “서편제” “강산제” 비조 박유전의 업적은 국가적 위인 반열에 해당하는 것으로 활동 거주지를

복원하고 성역화 함으로 민족음악을 전수전승하고 있는 국악인들에 귀감이 되게 함은

물론 보성 지역 활성화에도 일익이 될 것이다.

 

아래 그림은 박유전이 생전 거주하었든 위치이다.

좌측 도면은 전남 보성군 보성읍 대야리 565번지 행골마을 박유전이 거주했다는 곳의

지적도면이 있다. 이곳에서 살았다는 근거를 증명해주고 있는 사연과 근거는 여기 다

기록할 수 없음으로“서편제 바로보기”책에 상세히 밝혀 놓았다.

그 이웃에서 태어나 자라온 이병주옹 당시 76세(1922년)생과 백형구옹 당시71(1923년생)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가 있었으며 기록학인은 우리나라 최초 지적도 및 토지대장 작성년도가 1910년으로 박유전 사망 1906년으로 아쉬웠으나 이웃거주 주민들의 증언들이 확신을 갖게 하고 있는 것이다.

 

건의사항 2

1. 박유전의 “서편제” “강산제” 전수전승 과정의 1등공신은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도강마을에 정착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쏟아 부어 떴떳한 민족음악으로 발돋음 할수 있도록한 정응민(1896~ 1964)이 있다.

 

2. 그는 그 후손들이 한 눈팔지 않고 민족음악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족 유훈 교육에도

문화재 반열로써 명가를 형성하고 있음에 귀감이 아닐 수 없다.

 

3. 다행이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조상 유적사업에 많은 공력과 지방자치단체의 후원에

힘입어 유적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하니. 다행한 일이다.

 

건의사항 3

 

조상현 명창이다. 100년전을 흟터 보아도 그런 명창는 없었다.

100년 후에도 나타나기 어려운 “불세출”의 성악가이다.

또한 현제 불리워지고 있는 판소리 80% 가“서편제” “강산제” 이며 서편제 강산제의 60%가 그의 수제자들로부터 전수전승 과정에 있는 상황이다 감히 추종을 불허

독주하고 있는 것으로, 지역을 떠나 전국적이며 세계적이다.

 

이와 같은 조상현 명창의 민족전통 음악 계승 보존 발전의 업적은, 국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며. 그의 후계자를 또한 그의 행적을 숭모하게 될 발자취는 영원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유전과 같은 전철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조상현 명창이 보성군 복내면 출신이란 것이 자연발생적인 우연일까 박유전

정응민 조상현으로 이어진 한반도 민족전통음악을 탄생 보존 유지 관리 전수 전승

세계화 성지로 각광받을 수 있도록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어찌 보물스럽지

않으리요.

 

이러한 세계적 성역지를 조성하는 것은 국책사업이 당연시 되고 있는 것이나 그렇게

되기 위하여 조상현명창의 활동무대로 소리때가 물씬 묻어 풍기는 성역지가 먼저 형성

되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 성역지는 박유전↔정응민↔조상현으로 3각 성역 동선벨트를 형성되면서 민족전통

음악 역사탐방의 현장 체험지역으로 세계화할 기본구도를 이루어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구비조건은 돈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신의 작품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한 사업은 국가(정부) 보성 행정당국. 조상현명창. 지역사회가 수시

고민해 보아야할 당연한 사안으로 실현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의하는 바이다.

 

15. 유네스코 무형유산등록 제도와 기준

 

민족의 오랜 역정(歷程)의 전통들은 그 시대 민중들의 삶에 적응되어지면서 소멸과

생성을 반복 진화되어오는 과정의 것들이 그 민족성을 대변해주고 있는 민족역정. 민족심성. 민족정기를 함축하고 있는 민족사인 것이다.

 

이와같은 민족사는 신흥국 또는 오랜 식민 지배국들이 단절 또는 소멸상태에서 1.2차

세계대전을 치루고 많는 신흥 민족독립국들이 탄생되면서 민족사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신화적으로 자기민족의 우월성을 허위. 위장 하는가 하면 전승국들은 패전국들의 우수한 문화재들을 약탈 자기들 국부창출에 활용하고 있음을 계기로 국제기구 유네스코는 인류걸작 제도의 제정이 필요케 되었으며 민족간 우월성에 첨예하기 때문에 국제적 기준설정에 사회 과학적 기법에 의한 공명정대한 시스템의 절차를 거칠수 있도록 2000년에 인류걸작 무형유산 보존 관리 등록제도가 제정 되었고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인류사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문학적. 예술적. 민족적. 민중적. 언어적. 전통적의

기준에 1분야 이상만 충족되면 인류걸작 문화유산으로 등록한다 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에 판소리가 100%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16. 맺 는 말

 

1) 인생은 짧고 역사는 길다 했다. 역사는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아 후손에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없이 떠난다. 그러나 우리의 일거수일족은 훗날 역사가 평가한다.

그 평가는 준엄하다.

 

2) 이글을 꼭 이렇게 극단적인 어구를 써가면서 발표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데 대하여

필자도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한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면

이글을 심층 분석하면 목표가 어디에 있었기에 이럴수 밖에 없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너그러운 이해 바란다.

 

3) 서편제 비조 박유전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후손을 두지 못하여 그를 찾는 길객 하나

없다 하여 정월 15일(보름)에 마을 노옹들이 벼신제를 지내주다. 21세기 들어 힘에 지처 지내주지 못한다는 사연을 전해들은 보성군 문화원 관계자들이 매년 정월보름날 행골

마을 박유전 유적 현장을 찾아가 주잔을 드리고 있다 하니

그 불씨 활활타 오늘날 민족역정 민족심성 민족정기의 뿌리가 정착되어지면서 민족

통일을 맞이하게 될 수 있을것을 기대하면서 보성 화이팅을 마음속 깊이 외친다. 끝

 

골자: 보성소리의 유래 정 회천지음 1993년남도문화연구

 

정응민 1896~1964(68세)

1. 1903년 7세때 伯父 정재근(1853~1914) 과 서울 대원군 사랑에 상경하여

박유전 (서편제) 이동백 (중고제) 윤판서 (충. 효. 열) 한학 공부했다.

1. 정재근은 정응민의 백부가 아니다---호족등본

2. 대원군사망 : 1898년으로 5년이 지나 대원군의 운현궁에 없었다. 허 위

3. 박유전도 없었음으로 서편제도 배우지 않았다.

4. 이동백도 없었음으로 중고제도 배우지 않았다.

5. 윤판서도 만나지 않았음으로 충.효.열의 한학도 배우지 않았다.

2. 1916년(20세) (13년간) 나라가 망하고(1910년) 대원군의 죽음으로 (1898년)

박유전이 생을 마침으로(1906년) 낙향 중

2.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음으로 낙향은 있을 수 없으며

⓵ 나라가 망하고-------1910년 --6년전 망함

⓶ 대원군 죽고 --------1898년--18년전 사망

⓷ 박 유전 생을 마치다.--1906년--10년전 사망

3. 전북부안 김찬업 명창에 동편제 춘향가를 배움

3. 서울에 가지 않았음으로 김 찬업에게 동편제를 배우지 않았다.

4. 보성 회천에 정착한 후 이동백 (중고제) 박유전(서편제) 김찬업 (동편제) 윤판서 (충. 효. 열) 한학을 융합한 보성소리 라하는 소리바디를 탄생시킴 --바디 : 명창이

 스승으로부터 전승하여 한바탕 전부를 음악적으로 절묘하게 다듬어 놓은 소리

4. 서울에 가지 않았음으로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충효열이 융합된 보성소리라

하는 소리바디는 박유전의 바디를 도용시킨 것이다.

5. 정 응민의 보성소리 바디란 춘향가는 (동편제) 심청가는

(서편제) 수궁가는 (중고제) 라 한다.

위와 같음으로 논란의 가치가 없는 허위 날조 -----성창순 계보공람

 

◎ 정회천의 보성과 박유전 관련

 

1. 박유전1835~1906년 순창출신 대원군 사랑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1. 박유전의 활동상들은 조선 창극사에서 학설로 정립되어 있는 것으로 대원군

사랑채에서 거주한 사실이 없다.

2. 대원군 실각 1873~1876 (3년) 청국유배때 나주 정재근 사랑채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1876년 유배 해제로 상경 대원군 사랑에 기거

2. 대원군실각기간1873~1876년 그 무렵 나주등지로 다닐 수 있었지 대원군

실각과는 무관했을 것이다.

3. 1916년 나라가 망하고 대원군이 죽음으로 박유전 스스로 생을 마치다.

3. 국사를 훼손시킨 국치 사항이다.

⓵ 나라가 망하고-------1910년 --6년전 망함

⓶ 대원군 죽고 --------1898년--18년전 사망

⓷ 박유전 생을 마치다.--1906년--10년전 사망

4. 정회천 보성소리의 유래 결론

1)박유전은 보성에 왔다는 사실이 없음으로 서편제와 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역사왜곡. 보성군 명애훼손 보성군민 우롱

.2) 정응민 선생이 창제한 보성소리만이 보성의 소리맥인 것이다를 강조하고 있으며 학계. 언론. 지역사회. 행정. 국악계. 등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라고 정착시켜가고 있는것은 보성군의 명예와 민족 음악사를 훼손시키는 우를 범하는 처사로써 보성군 행정당국과 관련기관 단체는 한사람이라도 더 알기 전에 보성소리의 맥이 정립되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3. 문헌으로 正立 된 -----보성의 소리맥

 

첫째. 보성하면 동 서편의 소리맥을 분류케 한 --------박 유전

1. 최초기록 문헌으로부터 보성거주확인

2. 박유전으로부터 서편제 와 동편제가 분류된 서편제 비조 (동편제 비조 없음

둘째. 100년 전에도 없었으며 100년 후도 나타나기 어려운 불세출의 

  세계적 성악가---------------------------- 조 상현

보성에 소리 때가 묻은 성역지 조성계획 수립 준비 박유전과 동 선

셋째: 보성소리축제 위상 고취를 위한 조치

허위 위장날조 로 국악사를 훼손시키는 국악인 과감히 퇴출

전주 대사습과 같이 솔직 겸손으로 솔선수범 정의 선도

 

O 위인과 명창 은 당사자 본인 업적을 우상화 하고 있음

◎ 부모. 선생. 주위환경은 보조역에 불과한 것임

시간상 두서없이 말씀 드렸습니다. 궁금한점 전화로 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연락주시면 설명 드리겠습니다.

2013. 1. 8.일

(사) 유네스코 판소리 진흥회 이사장 이 태 호

 

2013년 1월 8일 전남 보성군청 주최로 보성소리 유래에 대한 세미나

에서 발표된 (사)유네스코 판소리 진흥회 이사장 이태호 회장께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세미나 내용 : 보성소리 유래에 대한 의견

발표자: 이태호/정회천(정응민의 손자)/보성문화원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