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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개념

탈() 전통성
탈춤이 무용과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종합예술이라면 판소리는 음악과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종합예술이다.
이처럼 같은 종합예술이라 하더라도 탈춤에 있어서는 무용이나 가면은 비교적 정제된 양식을 갖추고 있지만, 연희(演 戱)의 중심을 이루는 문학적인 내용이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되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판소리는 비록 무용이 경시되는 점이 있긴 하지만, 중심을 이루는 음악과 문학은 심미적 가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따라서 종합예술로서의 가치는 판소리 쪽이 좀 더 높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탈춤은 아직도 종교적인 제례의식의 전통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나, 판소리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제례의식의 굴레를 벗어난 독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탈춤보다 한걸음 앞선 신흥 예술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이처럼 판소리가 탈 전통으로서의 새로운 예술 운동의 앞장을 섰다는 점은, 제의로부터의 탈피뿐만이 아니라,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음악의 측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판소리 음악은 악보가 없기 때문에 저급한 음악이라고 부당한 규정을 지으려는 이가 있다.
악보가 있고 없는 것으로 예술적 가치를 규정짓는 기준을 삼는 것도 이상하려니와, 판소리 음악의 창조자들이 악보에 얽매인 전시대적인 음악의 비예술성에 싫증이 났기 때문에 발랄하고 참신한 새로운 예술의 창조에 참여했다고 하는 역사적인 의의를 묵살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더구나 지난날의 전통음악의 대표적인 제례악이나 연례악이 제례나 의식의 절차라는 객체적인 요소에 따라 기계적으로 조곡(調 曲)이 변화 되었지만, 판소리 음악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문학의 내용이 바뀌는데 따라서 음악의 조곡이 변화되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서 예술적인 주체성이 훨씬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판소리는 초상집이라고 해서 슬픈 곡조를 부른다거나 잔칫집이라고 해서 경쾌한 곡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사설의 내용에 따라서 우조(羽 調)에서 계면(界 面)으로 바뀌고 ‘진양’에서 ‘중모리’로 바뀌게 마련이다. 급박한 사건의 표현에는 ‘휘몰이’장단이 운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창법이나 장단의 운용 원리는 이른바 ‘이면’을 그린다는 창조자들의 태도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정통성
이처럼 판소리 창조자들은 문학적인 내용의 전개를 가장 유효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음악적인 수단을 총동원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속적인 전래 음악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불교 음악을 따오기도 하고, 때로는 민중 속에 사무쳐 있는 민요를 부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가곡이나 악장의 창법을 응용하기도 하고, 시창(詩 唱)이나 송서성(誦 書 聲)까지도 도입했던 것이다.
문학적인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들 판소리 창조자들은 선행했던 모든 음악적 유산을 도입하여 원용하는 열성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판소리 음악이 악보와 규식(規 式)과 절제에 얽매인 전통음악을 탈피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기성 권위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이처럼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에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태동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판소리 예술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기성 권위의 고정 관념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현대라는 시점에 서서 객관성을 지녀야 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논자들은 판소리 음악이 전통음악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또 악보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여 그것을 저급한 음악으로 규정짓고 있음은 부당한 일이다.
그러한 사고방식이나 논리를 시인한다면 새로운 예술의 발전이나 창조는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착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논자들이 판소리 음악을 민속음악이라 지칭하여 왔다.
그러나 위에서 말해온 바와 같은 판소리 음악의 성격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한마디로 판소리 음악을 민속음악이라는 개념으로 처리하는 것이 부당하였음을 반성할 때가 왔다고 하겠다.
물론 판소리 음악 가운데 부분적으로 민요나 무가와 같은 민속음악의 요소가 끼어들어 있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열거하였듯이 판소리 음악에는 그에 앞서는 모든 음악적 유산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면 판소리 음악을 간단하게 민속 음악으로 규정짓는 일은 수정되어야 하겠다.
바꾸어 말하여 판소리 음악은 그에 선행하는 모든 음악 예술의 장점을 종합 정리하여 새로 창조된 민족적 정통 음악이라는 새로운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는 뜻이다.
선행하는 모든 음악 예술의 유산을 딛고 서서 그 바탕을 잃지 않으면서 새 시대의 감각에 맞도록 재창조하는 데 성공한 새로운 예술 형태라면, 그것이 곧 민족 음악을 대표하는 정통음악으로 새롭게 형성된 것이라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뜻에서 우리는 판소리 예술을 민족적 정통음악을 대표하는 본격 예술로 내세우는 데 결코 인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술성
만일에 판소리 음악을 민속 음악이라 한다면 그 음악이 그렇게도 중시했던 문학적인 내용, 즉 판소리 사설에도 민속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춘향전’을 정통적인 문학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문학자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춘향전’을 민족 문학 최고의 조건으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은 형편임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춘향전’이란 다름 아닌 판소리 사설 ‘춘향가’가 문자상에 정착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판소리 사설은 종합예술로서의 판소리 예술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이 판소리 사설도 판소리 음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에 선행하는 모든 문학적인 유산을 종합 정리한 바탕위에 새로운 문예 양식으로 정립되었음은 판소리 사설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쉬 알 수 있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판소리 사설은 지난날의 평시조, 양반 가사, 양반 소설 등을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일상어 비속어 의성어 의태어 등을 도입하여 새로운 표현 기교를 확립함으로써 정통적인 민족문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던 것이라 하겠다.
한편 판소리 청중을 상대로 공연되는 무대 예술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극적인 특질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작품 구조도 소설적이기보다는 다분히 극적이다. ‘춘향가’에서의 춘향의 고난, ‘심청가’에서의 심봉사의 고난, ‘흥부가’에서의 놀부의 고난, ‘수궁가’에서의 토끼의 고난, ‘적벽가’에서의 조조의 고난, 이들의 끈덕진 고난의 경험은 매우 극적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처럼 판소리 사설이 극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음과 아울러 공연물이기 때문에 창자는 배우이기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판소리 창자는 성악가이면서 동시에 배우로서의 구실을 치러야 한다.
이 점에서도 종합예술로서의 판소리 예술의 또 하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무대 예술인 연극에서는 문학적인 사설과 음악과 연기로써 관중을 공명공감하게 하고 감동시켜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서양의 오페라는 판소리와 공통된 점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오페라의 관중이 우는 것을 본 경험이 없다. 반면 우리의 판소리를 듣고서 옛날의 목석과 같은 선비를 비롯하여 오늘날 판소리를 처음 듣는 젊은 청중에 이르기까지 곧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다.
아마, 노래로써 사람을 우리는 음악 예술로는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 판소리가 아닌가 한다.
더구나 판소리는 그 비극적인 내용이 희화화(戱 畵 化)된 경우가 많다.
그런 희화화된 내용을 순전한 음악적 표현으로 사람을 삼동시킨다면 그것이 얼마만큼 차원 높은 예술인가 하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종합성
앞에서 우리는 종합 예술로서의 판소리의 몇 가지 성격을 살펴보았다.
첫째로 음악적인 면에서 선행하는 모든 음악 유산을 골고루 도입 섭취 하여 종합 정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둘째로 문학적인 사설에서도 선행하는 모든 문학 유산을 종합 정리하여 신흥 예술로서의 판소리 예술의 근간을 이루었음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같은 종합예술인 탈춤에 비하여 종합 예술로서의 예술적 가치가 훨씬 세련되고 정제되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다시 나아가서는 판소리가 무대 예술의 하나이기 때문에 연극적인 특징을 아울러 지녔고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고도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지적하였다.
따라서 판소리는 음악, 문학, 연극의 여러 특질이 결합되어 짜여진 종합예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판소리의 형태는 창, 아니리, 발림의 3대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이란 음악적인 요소를 이름이고, ‘아니리’란 창으로 하지 않는 대사의 전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림’이란 배우의 연기, 즉 몸짓을 뜻하는 말이다.
이 경우 몸짓이란 연극에서의 배우의 몸짓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음악에 수반되는 몸짓이라는 점이다.
음악에 맞추는 몸짓은 곧 무용이다.
따라서 발림은 무용이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함은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격에 맞는 발림을 하기 위하여 판소리 창자는 무용의 수련을 쌓아야 한다.
따라서 판소리 예술은 음악, 문학, 연극, 그리고 무용이 한 데 엉키어 이루어진 종합예술임을 쉬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판소리로 일가를 이루는 데에는 30년이란 오랜 수련을 쌓아야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판소리의 여러 레퍼토리에 나타나는 그 끈덕진 고난의 경험은 어쩌면 판소리 창조자 자신의 예술적 체험의 상징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끈덕진 고난의 중복된 상황을 차례차례로 타개해나가는 예지와 의지는 바로 판소리 창조자들의 슬기로운 예지와 굳은 의지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치고 꾸준히 싸워서 창조해낸 종합적 본격 예술을 저급한 예술이나 민속 예술로 낮추어 볼 수는 없다.
판소리 예술에 대해서 정당하고도 올바른 평가와 이해가 있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