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대회·공연

공연안내

[판소리유파대제전] 조선성악연구회 설립배경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12/01/26
  • 조회수2534
파일첨부

조선성악연구회 설립 배경

1) 판소리보존회의 창시 거론 자는 순천 벽소 이영민 (碧笑. 李榮珉)

선생이고 자금후원자는 순천 우석 김종익 (友石 . 金鍾翊) 선생임.

2) 구입일시: 1935년

3) 명칭 : 조선성악연구회

4) 소재지: 서울 익선동 157번지

5) 구입동기: 1935년 순천 벽소 이영민 선생은 항일 독립 운동가였다. 일제 조선 문화말살정책으로 국악인들이 조직체 없이 방황하므로 순천에서 국악 관극 시사 작업 중 친일지주 우석 김종익의 자금을 이용하여 국악을 활성화 시켜 독 립운동에 활용코자하였다. 그 계획이 적중 되어 우석에 게 조선성악연구회 건립자금지원을 요청 하게 되고 우석 또한 고향에서 지주인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농민운동가 벽소 이영민을 달래고, 항일 도립 자금 막후지원도 되고 박녹주를 지원할 수 있게 되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역 할을 하기에 이른다.

6) 정광수 선생 녹취록 보관 2003.7.15일

7) 현장탐방;2006년 한갑주 선생 안내로 익선동 2회 현장탐방 하였음.

*조선성악연구회와 우석 김종익 관련 내용*

1) 1935년 서울 익선동 157번지에 대지 500평 건물 200평의 조선성 악연구회 설립기증자 순천부호 김종익에 관한 짤막한 국악계 문헌 의 기록이다.

2) 당시 국악계는 앞서 설명 된 바와 같이 1905년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으로 원각사가 폐지된 후 속수무책으로 세월을 보내다 1920년 전국 주요 도시에 예기조합 또는 권번이 생기면서 국악 후 진 양성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3) 1935년 순천부호 김종익 선생이 거금 일만 원을 투척 조선성악연 구회 사무실을 건립 희사하여 활동비 까지 후원함으로서 전국에 흩 어져 있던 국악인들이 다시 결집(130여명)하여 창극운동의 전개와 후진양성이라는 목표 하에 직속 극단으로 창극좌(춘향전)를 조직 하고 전원이 총동원되어 전국 순회공연 펼쳤다.

4)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이 재력이 없어 창극단을 만들지 못 할 것이 라고 방심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창극단이 조직 되어 전국순회공연 으로 군중집회를 가짐으로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39년 문화 활동 의 모든 체제를 정비 한다는 구실 하에 1940년 4월 창극단체를 연 극협회에 소속시켜 경무국이 관장 관리케 함으로 활동 4년 만에 해 산을 이르렀다.

5) 이상과 같이 순천 김종익 선생이 어떠한 사유로 그렇게 큰돈을 국 악인들을 위하여 희사 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고 또한 조선성악연 구회가 어떤 연유를 가지고 해산이 되었는가를 생생한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정광수 선생과 대담 녹취 내용 ―

대담장소 : 2003.7.15(화) 17:30~18:30 (정광수 옹 자택)

대담인 : 이태호(『판소리』 세계무형유산 등록추진 협의회장)

녹취인 : 정광수 (『판소리』 무형문화재 제5호 '수궁가' 보유자)

* 본 대담문은 2003.7.31일 순천에서 개최되는 『판소리』유네스코 무형유산 등록을 대비한 세미나 (벽소 이영민 선생 『판소리』정립)에 참석을 하지 못하게 된 정광수 선생과의 대담을 녹취한 것임.

〈녹취내용〉

이태호 - 정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정광수 - 먼 곳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이태호 - 정 선생님이 순천 국악선생으로 계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정광수 - 1932년부터 1935년 ... 한 3년 있었지요.

이태호 - 정 선생님 가시기 전에도 순천에 국악원이 있었습니까?

정광수 - 국악 판소리는 1:1 전수교육입니다.

순천에 국악인 하면 오태석, 오끗준, 박초월 등등

그 당시 많이 배출되어 있었어요.

그분들이 어떻게 배출이 되었겠습니까?

판소리 전수교육은 1~2년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수십 년 지역에서 판소리가 저변 확대되어 있었다는 것 입니 다. 순천 국악은 1~2백 년 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순천은 예로부터 관기가 있어 음악이 성행한 곳으로 더욱 뿌 리가 튼튼하지요. 국악 가르치는 사람들을 기록을 하지 않아 묻혀버렸다는 것이지요. 순천 판소리의 뿌리는 우리나라 국 악 판소리 뿌리와 맥을 같이 봐야합니다.

이태호 -순천 국악교육이 선생님이 가신 1932년 보다 이미 오래전부 터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정광수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국악원 선생으로 갈 때는 그 지역에 국 악이 활성화 되어 있어 수요자의 요구가 있어서 가는 것이었 지 기초교육 보급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태호 - 그때 순천에서 봉급을 받으셨습니까?

정광수 - 그때 봉급을 관에서 주는지, 돈 많은 부자들이 주는지, 특별 히 나오는 곳을 나도 모르게 관행처럼 내려오고 있었는데 관 리 운영비가 지역 유지들한테서 협찬금이라 할까?... 부족하 면 순천 군수가 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이태호 - 순천 계실 때 벽소 선생님께서 사진을 찍어 주셨는데 기억 하십니까?

정광수 - 그럼요. 그 시진이 가보 1호입니다.

이태호 - 벽소 선생님과는 친하게 지내셨습니까?

정광수 - 친한 사이보다 스승과 제자 같은 사이였어요.

선생이 나보다 27살 위였고 학문과 식견이 보통사람들은

따라 갈 수가 없이 높으신 분이였어요.

이태호 - 벽소 선생님과 가까이 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정광수 - 선생은 독립 운동가였어요. 애국지사지요. 서울에서 여운형, 조소앙, 이인, 정노식 같은 분들이 자주 찾아왔어요.

그때 마다 꼭 국악원으로 모시고 와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그래서 저도 그 훌륭하신 분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지요.

이태호 - 조선성악연구회와 벽소선생이 연관이 있나요?

정광수 - 있고말고요. 하루는 서울에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 왔어요. 같이 오신 분 중에 우석 김종익 선생도 왔고요.

여럿이 이야기 도 중 국악인이 많이 있으니까 왜 국악인들 이 이렇게 많이 있느냐고 얘기가 시작 되었지요.

벽소 선생이 일제의 식민통치로 대중 집회를 갖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우리문화 말살정책의 희생물이 되어 이렇게 하 는 일을 잃고 우리 순천으로 모여들어 소일들을 하고 있다 고 일장연설을 하신 것이었어요. 벽소 선생은 말씀이 아주 웅변 식으로 달변가이십니다.

그때 우석 선생이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국악인을 활용한 민족운동이냐 물었습니다. 벽소선생은 서울에다 국악원 사 무실을 마련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국악인들을 결집시켜 창극단을 조직케 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하게 하여 우리 민 족정기의 살아 움직임을 국민에게 보이는 것이 시급하다 하 신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우석선생이 그럼 만 원 정도면 마련할 수 있겠느 냐? 하니까 이동백선생이 충분 할 것 같다 하니 우석 선생 이 즉석에서 내가 만원을 줄 테니 그렇게 하여보라 하셔서 송만갑, 이동백, 한성준 세 사람이 그 날로 서울로 올라가 익선동에 대지 500평, 건물200평을 구천 원에 샀어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태호 - 그 어렵사리 마련된 조선성악연구회가 왜 해산 되었는지요?

정광수-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려놓고 전쟁 물자가 딸리니까 우리 나라 물자로 전쟁을 치루기 위하여 전국에 있는 연예 단체 들을 경무국 산하로 통합 하고 경찰통제 하에 황국신민 내 선일체 다하고 일본 앞잡이 노릇을 시키는 데 그때 우리나 라 연예 단체 뿐 아니라 소위 지식인이다 하는 사람들이 더 앞잡이 노릇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본 앞잡이는 되지 말자고 해산을 해버린 것이고 조선성악연구 회까지 해체 시키고 청산위원을 정하였는데 나도 청산위원 한 사람이었어요.

이태호 - 그때 그런 애국정신이 어떻게 그렇게 강하셨습니까?

정광수 - 우리 민속 국악 판소리가 민족혼의 소리 아닙니까?

우리 국악인들이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면 우리 민족혼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국악인들이 나라 민족 배신하는 것 보았습니까? 국악 자체가 민족혼이 다 하는 것을 우리 국악인들은 특별이 교육 안 받아도 소리 속에 담겨져 있어 민족운동가가 된 것입니다.

스스로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일편단심 정신이 없으면 판소리 하지 못 합니다.

이태호 - 벽소 선생이 항일 민족 운동가였다면 우석선생님은 당시 여 건상 많은 재산을 육영사업에 기탁하고 벽소 선생과 연계 하면서 지내온 사이였다고 봅니다.

정광수 - 맞습니다. 그 두 선생님 말씀이 나왔으니까 말합니다만 우리 국악인들이 부끄러워서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당시 순천 벽 소 선생님이 우리 국악인들이 오갈 때 없이 방황하고 헤맬 때 전부 순천으로 몰려들었지요. 왜 다른 지역도 있는데 순 천으로 왔겠습니까? 그 증인은 제가 있습니다. 벽소 선생님 은 국악 판소리를 우리 민족의 혼이라고 생각하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석 선생으로 하여금 조선성악연 구소의 필요성을 더욱 역설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태호 - 그때 그러한 상황들이 지금 국악인이나 국가에서 얼마나 아 는 분이 있습니까? 기록이 없으니까요.

정광수 - 지금은 다 물론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당시 사람들 이 있었는데 아쉬운 것이 국악에 대한 기록들을 소홀히 하기 때문인데 정부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태호 - 조선성악연구회 활동상황은 국악사에 기록 되어져야 할 국악 인들의 민족 해방운동이었는데 그렇게 중요한 업적들을 국악 협회 같은 단체에서 왜 방치 하고 있나요?

정광수 - 그래서 부끄럽다는 말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인데 젊어서는 다음 기회가 있겠지 하고 넘어가고 지금은 늙어 활동할 힘이 없고 죽기 전에 밝혀 놓을 것 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일들을 누가 그렇게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끄럽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네요.

이태호 - 오늘 선생님의 말씀으로 묻혀 질 번한 중요한 내용들이 밝 혀 졌습니다.

정광수 - 이 선생이 꼭 기록으로 후세에 전해 질 수 있도록 부탁 드립 니다.

이태호 - 순천에서 인물 자랑 하지마란 속담이 있는데 언제부터 인지 를 알 수가 없는데 혹시 선생님 들어 보셨는지요?

정광수 - 그건 그 당시 벽소선생님을 찾아오신 선생들을 모시고 식당 에 가면 형편이 곤란 하니까 식당 반찬이 들나물로 순천에 는 고들빼기가 많지 않습니까?

생김새가 인삼 비슷하잖아요.

아침이나 저녁이나 식사 때마다 나오니까

이분들이 서울 회의 때 순천은 부자들이 많아 인삼으로 반 찬을 해 먹어 여자들이 다 미인이드라 했다 해요.

벽소선생님 말씀이지요. 이 회의 때 나온 말이 인물 자 랑 하지 말라고 외부에서 일컫게 된 것입니다.

이태호 - 순천 세미나에 선생님이 꼭 참석하시어 생생한 증언의 말씀 을 많이 들려 주셨으면 좋을 것인데 못 오시게 되어 아쉽습 니다. 세미나를 계기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저에 게 하십시오.

정광수 - 이 선생 말씀대로 우리 『판소리』가 세계무형문화유산이 되 고 벽소 이영민선생의 업적이 복원된 것을 보고 죽으려고 이렇게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기원 합니다.

이태호 - 더 하실 말씀이나 후세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정광수 - 우선 순천의 발전을 기원하고 순천이 국악의 고장이고 발현 지이니 관에서 적극 지원하여 정려 진흥함으로써 한 차원 더 높은 세계로 발전 계승되기를 바랍니다.

상단으로 이동하기